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/평가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<#ffffff>[[파일:박정희 전 대통령 평가.jpg|width=100%]]|| >'''[[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|내 [ruby(一, ruby=일)][ruby(生, ruby=생)] [ruby(祖, ruby=조)][ruby(國, ruby=국)]과 [ruby(民, ruby=민)][ruby(族, ruby=족)]을 [ruby(爲, ruby=위)]하여]]''' >---- >'''박정희''' >'''그분의 과보다도 공이 훨씬 더 큽니다.''' >---- >[[전원책]][* 1955년생 변호사, 시인.][[https://m.youtube.com/watch?v=A6OKkEe1L7c&t=34s|#]] >'''부정부패의 원조''' >---- >[[김영삼]][* 2001년 발행한 김영삼 회고록 발췌] >'''지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6·25의 폐허에서 허덕일 때 '우리도 하면 된다'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러일으켰다. 정치를 하면서 우리가 최대 정적이었지만 국민들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평가할 만하다.''' >---- >[[김대중]][* [[http://m.raythep.com/newsView_v2.php?cc=270001&no=15238|#]]] 생전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가장 극심하게 엇갈리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.[*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박정희 수준으로 [[호불호]]가 갈리는 인물은 거의 없다. [[흥선대원군]]조차 박정희의 호불호에는 미치지 못한다.] [[대한민국 대통령]]들뿐만 아니라 정치인 중에 호평만 듣는 인물이 어디 있겠냐마는, 박정희는 낙후되어 있던 한국이 급격히 정치·경제·사회·문화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20년 가까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공과가 더욱 뚜렷하다. 공을 꼽는다면 [[일제강점기]]에서 해방 이후 [[6.25 전쟁]]을 거치며 심각하게 피폐해져 빈곤한 상황이던[* 다만 당대 세계에 한국보다도 가난한 나라들은 많았기에 당대 기준으로는 후진국 중하위권 수준이었다. 오늘날로 치면 [[방글라데시]], [[인도]] 포지션이었던 셈이나 이들의 경제 발전상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이보다 더 열악했다고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.] 한국의 재건에 주력하여 4차에 걸친 [[경제계획/대한민국|경제 개발 계획]][* 다만 1차는 [[장면 내각]]이 짠 계획이긴 하다.], 각종 산업 육성과 대기업 성장 지원 등으로 연간 경제 성장률이 9회에 걸쳐 10%를 넘길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로 국가 경제와 인프라를 재건하고 미래 산업에 대한 식견으로 [[경부고속도로]] 건설, [[중화학공업]] 육성 등을 강행하며 18년 동안 한국의 GDP를 약 18배로 상승시키고 절대 빈곤율을 기존의 1/6 수준으로 낮추며 식량의 자급자족을 가능케 하여 식량난을 없앤 점이 대표적인 성과였다. 과를 꼽자면 정치적으로는 [[긴급조치]], [[김대중 납치 사건]], [[인혁당 사건]]을 위시한 정적 탄압과 [[10월 유신]]을 기점으로 사실상의 1인 [[독재]] 체제를 확립하는 등의 권위주의 독재로의 회귀가 대표적인 과로 꼽히며,[* 어찌 보면 [[전두환]]과 더불어 '한국에서 대통령이란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직업'이라는 징크스를 만들어 16년 동안 유지시켰고, 그게 깨진 뒤에도 '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년만' 있을 수 있는 직책으로 40년 넘게 굳어지게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다. 그 예로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를 꺾을 뻔했던 [[김대중]]은 부정의 개입으로 낙선했고 1998년에 가서야 당선되었으며, 만약 그 시절에 당선되었다면 운이 따라주면 8년까지 앉을 수 있었던 자리를 5년으로 마쳐야 했다.] 사회 전반적으로는 징병률의 급격한 상승 및 병사 사실상 동결[* 유신 전에는 경제성장률에 따라 급여 인상률이 높았는데, 유신 이후에는 경제성장률이 이전보다 높아졌는데도 급여 인상률을 대폭 낮췄다.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군 급여를 삭감한 수준.] 등 [[징병제]] 개악, 대중가요 금지곡 지정을 위시한 문화 검열, [[선감원]]과 [[서산개척단]] 등 부랑아 가혹 행위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방면에서의 인권·기본권 침해가 꼽히고, 경제적으로도 [[양극화]] 및 [[부정부패]], 노동 착취 등의 문제가 있었다. 이런 이유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한민국 현대사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빼놓고 논할 수 없으며, 특히 경제 및 산업 구조에 그 영향을 크게 드리운 인물이다.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경제학자이기도 한 [[유승민]]은 저서에서 박정희의 경제적 공과와 명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. >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지만, 경제에 관한 분명한 철학, 전략과 용인술을 갖춘 지도자였다. 포항제철{{{-2 (현 포스코)}}}, 울산·구미·창원·여수의 중화학공업, 경부고속도로, 새마을운동과 농어촌 근대화, 복지제도 도입 등 1960~1970년대의 수많은 업적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우수한 경제관료들, 그리고 무엇보다 성실하고 근면한 국민들이 만들어놓은 합작품이다. >---- >[[유승민]], [[http://www.kyobobook.co.kr/product/detailViewKor.laf?ejkGb=KOR&mallGb=KOR&barcode=9791197855917&orderClick=LEa&Kc=|『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』]] 377쪽 >초기의 한국경제는 자유시장경제,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했지만 그와 동시에 관치경제, 계획경제의 성격이 강했다. 특히 1960~1970년대의 박정희 모델은 다분히 국가주도형이었고 박정희 모델이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198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 그 성공신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. 박정희 모델 이후에 우리 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제도의 선진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의 선진화가 필요했으나 둘 다 미흡한 상태에서 IMF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. >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고속성장을 가능케 했던 제도는 1990년 이후 더 이상 성장에 플러스로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. ... 박정희 모델로 성공한 경제가 박정희 모델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정체된 것이다. >---- >유승민,『야수의 본능으로 부딪쳐라』 347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